전공 관련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읽게 되었다. 디스토피아 소설이며, 줄거리는 간단하게 말하면 다음과 같다. 2692년의 지구는 치사율 100%의 리누트 바이러스가 퍼져있는데, 생존을 위해 인공지능 기반 마을을 세운다. 세대가 많이 지나고 이들은 태어나서 바이러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만’ 살아가게 된다. 여기서 자연발생하는 상상과 자유는 생존을 위해 버려져야 하는 비합리적인 것이다. 또, 합리적인 선택은 모순이 적은 선택을 의미한다.
책을 읽으며 비슷한 구조의 책이 몇 권 떠올랐다. 조은오 작가의 <버블>, 이강백 작가의 <파수꾼>이다. 이 세 작품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통제된 사회에서의 인간상을 다룬다는 점이다. 그중에서 <부적격자의 차트>는 인간 대 인간의 관계에 주안점을 둔 버블과 다르게 인간 개인의 자유에 주안점을 둔다. 더불어 파수꾼은 사회 통제 시스템이 주관적 견해를 가진 인간이라는 반면에 부적격자의 차트는 인공지능 “중재자” 모세를 기반으로 통제되는 사회임이 눈여겨볼 만한 점이었다.
두 가지 생각에 중점 해서 서평을 적어보겠다. 첫 번째는 생존과 산다는 것의 차이, 두 번째는 합리적인 선택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 중재자 모세를 기반으로 한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은 오로지 치사율 100%의 바이러스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만 살아간다. 이름도, 일도, 유전자도 모든 선택이 합리적으로 생존하기 위해서이다. 자의는 존재하지 않고, 부여된 운명을 산다. 그렇다면 이 마을 사람들은 과연 삶을 산다고 할 수 있을까? 분명 의문이 생긴다. 생존이란 자기 삶을 장악하지 못하고 명맥을 이어가는 것이고, 산다는 것이란. 어떻게 해야 존엄을 잃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미를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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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결말을 주의 깊게 볼만하다. 바이러스는 치사율 100%이 아니었고, 그중에서도 살아남은 사람이 존재했다. 체온이 낮아서 인공지능이 인간의 생체신호를 탐지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그 세계를 깨고 나왔는데, 살아남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그래도 인간은 자유를 갈망할 수 있을까.. 결말이 긍정적이라 생존을 우선시하는 사람들의 삶까지 폄하하는 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중재자 모세는 모순이 적은 선택을 합리적인 선택이라 칭한다. 각각의 모순들 중에서 개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순의 개념이 모두 다들 것이다. 해서 생존보다 자유가 우선적인 선택을 존중해달라면, 중재자 모세의 선택을 따르는 이들을 존중하기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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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24세기까지 가지 않아도, 우리 삶에 이런 고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히 마련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돈을 버는 사람들이 있겠다. 당장 내가 일을 하지 않으면, 내 가족이 한 끼는 굶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내 생존은 물론이거니와 내 가족의 생존을 위해 일해야 한다. 생존해야 삶이 있는 것이다. 내 가족의 삶을 위해 내버린 나의 삶도 있을 것이다. 빈약한 나의 삶도 그 자체로 삶이라는 걸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돔을 나온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옳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 마을에서 남은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삶도 결국 삶이다. 생존을 위한 삶이 존엄한 삶이 될 여지가 충분하다. 어떠한 사랑의 형태도, 어떠한 삶의 형태도 모두 존중받는 세상이 되길 빈다. 안타깝고 가난한 삶에 연민 의식을 가지는 게 먼저가 아니라, 그 삶에 대한 존중이 우선이다.